Fri, 25 February 2011
[특별낭독] 최양업 신부님 서한집 - 다섯번째 편지. 최법관 신부님 낭독. 가톨릭 매일 복음 팟캐스트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복음지기 최법관 베드로 신부입니다. 오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다번째 서한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편지는 네번째 편지 이후 5개월만인 1847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쓰여졌습니다. 이 편지에는 입국을 시도하던 최양업 토마스가 조선 근해에서 난파를 당하는 소식이 나옵니다. 오늘날의 전북 군산 근처 고군산군도인데, 재미 있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조선의 동포 신자들을 만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럼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Fri, 18 February 2011
최법관 신부님 낭독. [최양업 신부님 서한집] 네번째 편지
가톨릭 매일 복음 팟캐스트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복음지기 최법관 베드로 신부입니다. 오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네번째 서한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서한은 세번째 편지 이후 5개월 정도 후인 1847년에 쓰여졌는데, 극도의 슬픔속에 쓰여집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고, 신자들에게 주님의 복음과 성체를 전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가, 너무도 허무하게 곧바로 체포되어, 참수를 당했다는 비보를, 그만 순교를 하고 말았다는 소식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도 잃고 이제는 동료마저 잃은 최양업 토마스.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다 라는 문장이 가슴을 적십니다. 한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마카오 신학교가 이전한 홍콩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조선에 있던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두 차례에 걸쳐 보내온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도착해 있었습니다.최양업 토마스는 이것들을 읽으며 위로를 받던 중, 장상의 명에 따라 로마 바티칸으로 보내기 위해 그것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최양업 신부님의 네번째 편지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Thu, 10 February 2011
최법관 신부님 낭독. [최양업 신부님 서한집] 세번째 편지.
가톨릭 매일 복음 팟캐스트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복음지기 최법관 베드로 신부입니다. 오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세번째 서한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서한은 1846년 중국 심양에서 쓰여졌습니다. 당시 부제였던 최양업 토마스는 매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조선에 들어가기 위한 귀국로를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두만강을 넘을 수 있는 지 보기 위해 조선의 동북쪽 국경지대인 경원 지역, 오늘날의 함경북도쪽으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압록강이 있는 서북쪽의 길을 알아보기 위해 봉황성 변문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때 르그레주와 신부님의 답장을 받습니다. 최양업 토마스는 그야말로 뛸뜻이 기뻐합니다. 하긴 1842년의 첫 편지 이후 4년여만에 도착한 르그레주와 신부님의 답장이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다음날 이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이 편지에는 스승님의 답장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잘 나타나 있고, 또 귀국로를 찾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모습도 잘 드러납니다. 당시는 12월이었는데 북한의 한겨울 날씨를 생각하면 혹한의 추위속에 국경을 헤맸을 그 두 사람의 고통이 눈에 선합니다. 실재로 이들은 극도의 빈곤속에 있었다고 편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편지를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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